티스토리 뷰

2023. 4. 26  도산서원

 

군자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산서원이 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할아버지께서 직접 설계하여 1561년에 창건한 건물이다.  
그리고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었다고 한다

도산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중 가장 아름다운 서원이라고 한다.
 
춥다 춥다...이럴줄 모르고 모두 얇은 봄 옷을 입고온터라 너도너도 춥다고 ㅎㅎㅎ
 
 

 
 
 

 
 
 
 
 
 

 
 
 

이곳이 안동호의 안동댐 상류지점이다.
왼쪽 낙동강 물줄기가 저 아래로 흘러 안동호에 담수가 되는데 가물어서
강변이 다 드러난 상태이다.
 
물이 좀 더 많이 흐른다면 훨씬 운치가 있고 아름다울터...아쉽다.
 

 
 

도산서원 앞마치 섬위에 외로이 세워진 한 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시사단(試士壇)으로 안동댐이 생기기 전에는 강변의 우거진 소나무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75년에 그자리에 10m를 높혀 원형 그대로 세웠다고 한다.
시사단(試士壇)은 조선시대 지방별과(地方別科)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각(碑閣)이다.
 
정조대왕께서 퇴계 이황선생의 유덕(遺德)을 추모하여 그 16년(1792)에 간원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임금의 제문(祭文)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이곳 송림(松林)에서 어제(御題)로 과거를 보았는데,
응시자는 7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안내문)
 
33명 (기억이 확실치 않다) 뽑는데 7천명이 모였다니 
이야기할머니 6.7 : 1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ㅎㅎㅎ
 
 

 

도산서원 앞마당에는 이와 같은 고령의 왕버들 두 그루가 있어서 시선을 끌게 한다.
이 왕버들은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을 지을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안동댐 조성 시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산서원 전면부 마당을 5m 가까이 성토하는 과정에서
지하로 대부분이 땅 속에 묻혔다.

퇴계 선생은 「도산잡영」에서 시냇가의 왕버들을 바라보며 풍류 넘치는
버드나무와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노래하였다.[안내문]
 
 
 

도산서원은 경북 안동시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중기 퇴계 이황 선생이 고향을 돌아온 후
제자를 육성하던 곳이다.
이곳은 1561년(명종 16) 퇴계선생이 직접 건립하여 제자를 육성하던 도산서당과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 퇴계선생의 위패 등을 모신 도산서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도산서원의 현판은 1575년 선조에 의해 하사된 한석봉의 친필이며 이후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고,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에도 훼손되지 않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였다.
 
현재 사적 170호, 보물 211호,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도산이라는 이름은 '질그릇 도(陶), 뫼 산(山)' 자로서, 옛날 이곳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화제청)
 
 

진도문 오르는 계단 양쪽으로 목단이 곱게 피어 있다.
 
 

도산서원 본관 건물로 들어서는 진도문(進道門) 좌우에는 광명실(光明室) 건물이 있다...
 
 

 
 

 
 

도산서당 푯말이 있는 나무가 매화나무다.
도산서원에는 약 300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다고 한다.
 
이황할아버지의 매화 사랑은 모두가 아는바와 같이 지극하셨다.
돌아가시전 유언을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고 하셨다는데 이는 지극히 아끼는 후첩 아무개를 
잘 살펴 달라는 비유적 말씀이라는 글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난다.

 
 

 
 
 

 

 
 

도산서원에 근무(?)하시는 분들인듯...이런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여러 사람을 보았다.
이 분은 자연스레 모델 포즈를 취하며  0사진을 찍으라는듯  ....
 

 
 

 
 
 

 
 
 
 
 
 

 
 
 

 
 
 

도산서원 현판은 1575년 선조가 내려주었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고 한다.
 
방안의 불을 끄고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ㅎㅎ
역시 엄니들이 석학을 길러 내는구나....
 
 

 

농운정사( 롱(隴)雲精舍)
농운정사는 퇴계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건물은 ‘工’자 모양으로 하였는데 학생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퇴계가 설계하였다.
농운정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동쪽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로 공부를 하는 곳이고, 서쪽 마루는 관란헌(觀欄軒)으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마루 뒤쪽에는 지숙료(止宿寮)가 있는데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
(문화재청)
 

 

 역락서재(亦樂書齋)
역락서재는 농운정사와 같이 도산서당의 기숙사이다.
1561년 정사성(鄭士誠)이 퇴계의 제자가 될 때 정사성의 아버지 정두(鄭枓)가 제자들과 협력하여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도산서당(陶山書堂)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할아버지께서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내가 앉아 있는걸 보고 108호 정희샘이 찍었다 

 
 

후기 쓸것을 대비해 해설사님의 뒤를 바짝 따라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고
기록하고 했어야 하는데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는 사람이니....
 
가을 단풍이 물들때 도산서원의 풍경이 그리 좋다하니 이 가을에 다시 한 번 가볼까나
그때는 열공해야지... 
 
 
 

 
 


 

그래도 108호 단체 인증샷은 남겨야지..
 
이렇게 좋은 분들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