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9, 11,4, 열여덟 유관순의 그 뜨거운 가슴을 만나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려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아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901년에서 1907년 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899년 3월 미감리회 선교사 스웨어러(Wilbur C. Swearer)가 박해숙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의 전도활동으로 1901년경 목천 사자골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얼마 뒤 그곳에서 몇 리 떨어진 지령리에 세워진 교회가 매봉교회의 기원이다.


그해 11월 일본군은 의병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령리교회당에 불을 질러 건물을 전소시켰다.

1908년 유관순의 일가였던 유빈기 (1883~1928)와 숙부 유중무가

케이블(Elmer M. Cable) 선교사의 지원을 얻어 교회를 재건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인들이 적극 참여하여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당시 교회의 지도자였던 조인원과 유중무는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교회 출신 유관순도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932년에는 교회의 존립이 어려워 총독부에 포교소 폐지계를 제출하고 교회 문을 닫았다.

1966년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창립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교회 복구 사업을 전개하여

이듬해 매봉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당이 건립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뒤 교회 건물이 노후해지자 기독교대한감리회가 교단적 차원에서 교회 신축 사업을 전개하여

현재의 교회 건물이 탄생했다.(다음백과 펌)









































            

유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희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유점선·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

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서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가 봉안되어 있다.(다음백과 펌)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