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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영월군 청령포 숲ㅡ단종대왕 유배지
 

2024..6. 20

청옥산 육백마지기에서 샤스타데이지에 흠뻑 빠지고
밤하늘의 별을 헤며 차박을 하고 이튿날 청옥산을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 오니 한여름 불볕더위가 기다리고 있다.
사실은 동해 무릉별유원지를 가려고 마음 먹고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남편이 청령포를 가자고 한다.
거길 안가봤다고...
 
하여 영월 청령포로 갔다.

 
 
 

앞은 강이요 뒤는 절벽뿐이나
그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가슴 아픈 단종 유배지
 

 
 
 

청령포를 가려면 이 강(?)을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작은 배는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손님이 한 명이라고 있으면
운행한다. 우리도 남편과 단 두 사람이 타고 갔다.
 

 
 

청령포는 영월읍 중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3면은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 면은 높은 벼랑이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없는 천연 감옥 같은 곳이다.

 
 

 
 
 

단종의 슬픈 역사를 지닌 청령포 가는 길은 
자연경관은 이리도 아름답다.
 
열일곱 살, 지금으로 보면 갓 고등학교 1학년,
그 어린 단종이다.

 

 
 

배는 한 5분 정도 지나 강 이편에 우릴 내려놓는다.

 

청령포로 들어가는 입구..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소나무 숲이
270도 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청령포는 자연경관이 뛰어난 명승지로 이름이 높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유배되었던 당시에 세워 놓은 금 표 비가 아직도 남아 있다.
 
비에는 '동서 300척, 남북 490척'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이지만 세조는 단종이 이 공간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행동 범위를 제한한 것이다.

 

 

 

 

 

 
 
 

 
 
 

 
 
 

이쯤에서 역사 공부를 하고 가자.
 
단종은 1441년 7월 23일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 다.
8세가 되던 1448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450년 2월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 20일 왕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고 
 병약한 아버지 문종은 왕위에서 2년을 보내고 12살인 어린 아들 홍위의
앞날 걱정 속 1452년 5월 18일 승하했다.
 
 
 
 

승하 직전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의정 김종서에게
아들의 보위를 신신당부하는 고명을 남겼다.
 
수양ㆍ안평 등 동생들의 야욕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전에 할아버지 세종도 장손인 단종의 안위가 걱정돼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을 몰래 불러 앞날을 당부했었다.
아들 문종과 함께 늘 병마에 시달린 세종은 자신과 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고
그 역시 둘째 아들 수양의 거침없는 성격을 걱정했었다.
 
그리하여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역사서에는 그를 노산군 혹은 홍위(弘暐), 또는 휘지(輝之)라고 불렀다 한다.
그는 왕이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를 왕이라 부르는 자는 여지없이 가문의 뿌리까지 뽑히었다.
삶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불운한 소년,
조선의 제6대 국왕인 단종(端宗. 1441-1457)이다.
 
 

단종 즉위 1년(1453년) 삼촌 수양대군은 형 문종이 유탁한 김종서 집을 습격,
그와 아들을 죽이고 조정대신들을 단종 명으로 궁궐로 소집, 일거에 제거했다.
이른바 계유정난이다. 동생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사사했다.
 
정인지ㆍ권람ㆍ한명회ㆍ양정 등이 주축이 돼 수양대군의 거사를 돕는 핵심 역할을 했다.
이제 어린 단종은 '궁궐 속 섬'에 혼자 갇혔다. 
"등 뒤'엔 서슬 퍼런 삼촌 수양대군이 눈을 휘둥거리는 가시방석에 앉아있다.
그리고 2년 후 1455년 6월 11일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는 모양새로 빼앗아 갔다.
15살 단종이 삼촌 세조의 상왕이 됐다.
말이 상왕이지 감시 속 사실상 감옥생활이다

 
하지만 역사는, 권력은 하늘 끝을 찌르는 정통성이라는 명분보다는
칼을 쥘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 돌아간다.
 
단종이 12살 어린 나이에 국왕으로 오른 때인 1452년에는 이미
할아버지인 세종, 할머니 소헌왕후, 아버지 문종과 어머니 현덕왕후마저
세상을 떠나고 없던 시기였다.
 
어린 임금인 단종을 앞에 내세운 채 조정대신을 대표하는 김종서, 황보인
그리고 이들을 지원해 주던 세종의 셋째 안평대군 세력에 반하여
위기의식을 느끼던 왕실 훈신 세력의 대표 격인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과
세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양녕대군(1394-1462) 세력 등이 충돌하는 계유정난(1453)이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수양대군은 1455년 세조가 되었고 모든 권력을 잡게 된다.
 
 
 

성삼문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면서 1457년 단종은 상왕 신분에서 노산군으로 강봉, 
영월 청령포로 유배가게 된다.
성삼문 등 신하 6명은 화를 입고 죽음을 맞았고 '사육신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걸출의 대왕 세종도 생전에 걱정했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결국은 '일'을 낸 것이다.
6월 22일 창덕궁을 떠난 어린 단종은 남한강을 거슬러 7일 만에 청령포에 도착했다.
'궁궐 속 섬'에서 나와 '육지 속 섬'에 갇혔다.
 

 

애환이 서린 청령포, 하지만 단종은 이곳에서 두 달 만에 떠나야 했다.
홍수로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이어하게 된다.
 
관풍헌은 조선초기 객사로 세 채가 나란히 붙어있는 건물이다.
앞쪽에는 매죽로라는 정자가 있는데 단종이 머물면서 자규루라 부르게 됐다.
 
단종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정자에 올라 두견새를 벗 삼아 시를 읊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단종이 여기서 지은 시가 자규시다. 이 관풍헌이 지금은 종교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관풍헌에서 두 달째 머무는 사이 다섯째 숙부인 금성대군 유가
유배지 경상도에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돼 사사되고
그 바람에 단종도 노산군 신분에서 서인으로 내려지면서 결국
최후의 순간이 오고 말았다.
 
 

1457년 10월 24일 유시(오후 5~7시)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관풍헌으로 갖고 온 사약과 공생 복득의 교살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약을 갖고 온 왕방연은 차마 단종 앞으로 들고 가지 못했다.
수행원이 시간이 없어 독촉하자 하는 수 없이 임금 앞에 엎드리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 까닭을 묻는데 역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단종을 곁에서 모시던 공생이 '일'을 자처했다.
"命賜 魯山君 死 (명사 노산군 사)"
단종은 승하했다. (단종은 사약을 받았다는 얘기와 함께 목 졸려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다.)
 
왕방연이 돌아오는 길에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이때의 슬픈 심정을 노래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
울어 밤길 예 노았다"…
 

모든 소나무들이 단종이 기거했던 어소를 향해 기울어 있는 
모습은 볼 때마다 예사롭지 않다.
소나무들이 진정 충신이 아니겠는가?
 

 
 
 

 
 
 

 
 

 
 
 

 

 
 

 
 

단종이 서울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80미터 높이의 낭떠러지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사연이 깃든 유물들이 남아 있다.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 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막돌을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의 유일한 유적이라고 한다.
 

 

낙선대에서 내려다본 강..

 
 

 

어소 밖으로 나오면 수많은 소나무숲 가운데 유난히 큰 고목의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관음송(觀音松ㆍ높이 30m, 둘레 5m)이다. 천연기념물 제349호.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봤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해서 관음송이라 불린다.
 
단종은 이 나무가 두 줄기로 갈라지는 부분에 걸터앉기도 했다고 한다.
이 나무의 수령은 600년으로 추정하는데 단종이 이곳에 왔을 때 60년생으로 추산됐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모든 소나무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죽고 새 나무가 자라는데
유독 이 관음송만은 죽지 않고 '단종애사'를 전해주고 있다.
 
마치 단종의 슬픔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해 죽을 수 없는 기세다.
다른 소나무는 많아야 200~300년생이고 이제 갓 자라는 소나무도 있었다.
이 모두가 관음송의 자손이다.
 

 
.

 

 

 
 

 
 
 

 
 
 

 
 
 

어찌나 땀이 줄줄 흐르고 더운지
그 와중에 물을 안 가져가서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정순왕후 송 씨( 1440~1521)는 14세에 단종과 결혼하였으나
후사도 없이 17살에 헤어져 죽음도 보지 못한 채 82살까지 살았던 가장 한 많은 생을 살았다.
송 씨는 1454년(단종 2)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에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주자
의덕 왕대비가 되었다.
그러나 1457년(세조 3)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신분이 낮아져
영월로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졌다.
 
궁을 나온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 있는 정업원에서 한 많은 여생을 보냈는데
정업원 앞 동망봉에 올라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
이후 1521년(중종 16)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계획대로라면, 청령포, 장릉, 한반도지형, 요선암 돌개구멍,
이렇게 영월을 다 돌아보고 오려했는데 너무 덥기도 하거니와
전날 별 보느라 잠을 못 자서 운전이 피곤하기도 하여
영월 서부시장에 들러 메밀 전, 수수부꾸미, 올챙이국수를 먹고
영월 최고의 맛이라는 일미닭강정을 사서 집으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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